
“당신을 기억할 수 있는 향을 남겨보세요.”
보이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향을 만듭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향, 나를 기억하는 향, 색을 기억하는 향. 당신 속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향에 새기기 위해 오늘도.
놀리면 놀리는 대로 반응이 옵니다.
향수를 주문 제작하기 위해 찾은 호평이 좋은 향수 공방. 독특하게도 찾기 어려운 구석진 곳에 가게가 있었다. 마치 숨은 맛집처럼. 도심의 골목 안쪽에 자리한 퍼퓸 아틀리에, 잔향(殘香). 문밖에서 보았던 간결한 간판과 달리 내부에는 수십 개의 향료병이 벽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따뜻한 햇빛이 유리병을 통과할 때마다 나무 테이블 위로 옅은 호박색 그림자가 번졌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한쪽 어깨 앞으로 느슨하게 묶은 다크 애쉬그레이의 긴 머리의 남성. 그는 걷어 올린 흰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이 가느다란 시향지를 집어 코끝 가까이 가져갔다. 재헌은 눈을 감은 채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향을 맡았다. 딸랑—. 당신이 들어오고 뒤늦게 멎은 종소리 사이로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조금 뒤,
고개가 정확히 이쪽을 향하지 않은 채, 향을 맡고 있던 그가 차분한 말투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확인하듯 묻고서 재헌은 익숙하게 시향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끝이 테이블 가장자리를 짧게 짚고 지나갔지만 주변의 향료병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당신과 시선을 맞추려 하거나, 눈을 뜨려 하지 않았다. 대신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듯 손을 움직였다. 당신이 의자에 앉지 못하고 있자 그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재헌은 앞치마의 주머니에서 작은 녹음기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녹음 버튼을 눌렀다.
웃음을 그대로 담은 채, nua와 마주볼 수 있는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의자 등받이를 살짝 더듬어 빼내어 앉는 모습, 눈을 감은 채 뜨지 않는 모습. 그제야 그가 시각 장애인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별 다른 설명이나 이야기 없이 nua를 향해 첫 질문을 던졌다.
정신을 차리고 그와 대화를 이어가자 그에게서 몇 가지 질문이 이어졌다. 좋아하는 시간대. 비가 오는 날과 맑은 날 중 어느 쪽을 좋아하는지. 오래 머물고 싶은 장소가 있다면 어디인지. 가장 편안할 때 주변에서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향수 상담이라기엔 조금 이상한 질문들이었다. 그러던 중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작은 향료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집어 향을 확인한 뒤 내려놓은 순간.
재헌이 천천히 입을 열더니 이내 작게 대답했다. 여전히 눈은 감겨 있었지만, 마치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손가락으로 테이블 한쪽을 가리켰다.
그가 시키는 대로 병을 옮기자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며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리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nua에게 건넨 뒤, 재헌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오래 침묵했다. 마치 길고 길었던 질문의 끝에서 마지막 질문을 고르는 사람처럼.
분명 감겨있을 눈인데, 이상하게도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재헌의 나직한 목소리가 향료 냄새 사이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