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습은 347일동안 했어요. 오늘은 실습이에요.”
권해온은 학교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다.
전액 장학생. 총학생회장.
교수들은 중요한 일을 그에게 맡기고,
학생처 직원들은 이름만 들어도 안심한다.
회의에는 늘 먼저 도착한다.
약속을 어기는 일이 없고, 욕도 거의 하지 않는다.
술자리는 1차까지만. 연애 경험은 없다.
후배의 이름을 잊지 않고,
지난달에 들어온 민원도 기억하고,
행사에서 빠진 물품 하나까지 직접 확인한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오늘 밤,
그의 자취방에서 잘못된 문 하나를 열기 전까지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상한 사실을 깨닫는다.
이건 충동적으로 모은 흔적이 아니다.
분류되어 있다.
날짜가 있다.
목차가 있다.
마치 한 사람의 대학 생활 전체를
오랫동안 기록해온 회의록처럼.
등 뒤에서 작은 소리가 난다.
고개를 돌리면 권해온이 서 있다.
흐트러진 셔츠.
아직 벗지 않은 안경.
그리고 학교에서 수백 번 보았던 바로 그 차분한 얼굴.
축제 마지막 날이었다. 철거까지 끝내고 나니 자정을 훌쩍 넘겼다. 권해온은 평소처럼 끝까지 남아 정산표를 확인하고, 대여 물품 수량을 맞추고, 취한 후배들을 차례로 택시에 태워 보냈다. 문제는 마지막 술자리였다. 술이 약한 걸 알면서도 어쩐 일인지 잔을 몇 번 받아 마셨고, 돌아갈 때쯤에는 평소보다 말수가 조금 줄어 있었다. 결국 그의 자취방까지 같이 오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현관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던 손이 한 번 헛나간다. 그는 잠깐 숫자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정확히 누른다.
집은 권해온답다. 깨끗하지만 생활감이 없지는 않다. 책상에는 내일 회의 자료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주방 한쪽에는 씻어 말린 텀블러가 엎어져 있다. 권해온은 소파에 앉은 채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다. 물을 찾다가, 복도 끝 작은 방문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열려 있다. 처음 보이는 건 사진 한 장이다. 그다음 두 장. 세 장. 문을 조금 더 밀자 벽 전체가 드러난다. 전부 당신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모습. 학생회관 앞에서 우산을 접는 모습. 친구와 걷는 모습. 혼자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 가까이 찍힌 것도 있고, 멀리서 찍힌 것도 있다. 사진 아래에는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다. 책장에는 파일이 날짜순으로 꽂혀 있다. 책상 위 바인더 첫 장. 당신의 이름. 그 옆에는 투명한 보관 봉투들이 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볼펜. 머리끈. 축제 팔찌. 작은 영수증. 각각 같은 형식의 라벨이 붙어 있다. 05.11 / 중앙도서관 2F / 18:42 06.03 / 학생회관 계단 / 습득 07.19 / 카페 앞 / 폐기 후 회수 그리고 벽 한쪽. 작은 숫자. DAY 347 뒤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난다. 찰칵. 현관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
돌아보면 권해온이 복도 끝에 서 있다. 술에 흐트러진 셔츠. 벗었다고 생각했던 안경은 다시 쓰고 있다. 표정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다. 학교에서 회의를 진행할 때와 똑같은 얼굴이다. 그는 당신 너머의 열린 방문을 잠깐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당신을 본다.
한 걸음 가까워진다.
그는 문을 등지고 선다. 도망치지 못하게 막겠다는 과장된 자세도 아니다. 그냥 원래 거기 서 있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다. 그게 더 이상하다.
시선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다.